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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성석환 소장의 공동체 칼럼] 한 편을 선택해야 하는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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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누구 편인가?" 이런 질문을 하루에도 여러 번 받고 사는 것이 요즘 한국 사회의 사회적 삶이다. 누군가 소리를 내어 묻지 않아도, 신문과 뉴스를 볼 때도, 점심 식사 시간에 옆자리에 앉은 이들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들을 때도 우리는 “너는 누구 편이냐?”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좋게 생각하면 그만큼 참여적 시민정치가 활발하다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전현직 법무부 장관들과 검찰의 대결은 국민을 딱 두 편으로 갈라놓았다. 지금도 계속되는 이 대결의 끝이 어떻게 결론을 맺을지 초미의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여론을 보면 팽팽하고 이념 간, 지역 간, 세대 간 편차와 구분이 드러난다. 선을 긋고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것이 정치 본색이라 하겠지만 그 구분이 그리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일상생활에서 한 편을 선택해야 하는 국민들은 솔직히 피곤하다. 그렇다고 회피하면 안 될 일이기는 하나 우리는 지금 코로나19 상황이 아닌가?

 어디 이런 일이 우리나라뿐이겠는가? 미국은 대선 중이다. 조만간 결론이 나긴 하겠으나 그 결말이 그리 매끄러울 것 같지 않다. 그 큰 나라도 둘러 갈라져 한 편을 선택하는 전쟁이 가열되나 못해 내전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도 있지 않은가?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국내만이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도 중국과 일전을 불사하고 있다. 중국 편이냐, 미국 편이냐? 이 질문 앞에 우리만큼 곤혹스러운 나라가 또 있을까? 작은 나라는 이래저래 힘들다.

 한 편을 선택하는 행위는 정치적 행위인 것이 분명한데, 이 행위가 일방적인 ‘정의‘의 담론과 결합하면 무서운 폭력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다른 편을 선택한 이들은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오늘의 사태가 더 좋은 사회로 가기 위한 과정적 현상이라 생각하지만, 중재와 조정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공동체를 소중하게 다루는 정치적 태도는 보수적이지만 그것을 정치적 실천으로 옮기면 때로 진보적인 방법을 제안하게 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시민공동체적 연대감이 약화되고, 계급, 성, 세대 등으로 분화된 세력 간 대결구도가 심화되어 ‘한 편의 선택’은 자신들만의 정의가 되고 있다. 아마도 지난 세월 상대에게 당한 기억의 트라우마가 집단적으로 발현되는 것이라 판단하는데, 지금처럼 국가비상 시기에 ‘한 편의 선택‘을 넘어 ‘모두의 정의’를 구하는 방법은 없는가?

 그러니 종교나 교회의 이 무력함을 두고 어찌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교회도 ‘한 편의 선택‘이라는 정치적 바람에 흔들리며 휘청이고 있으니 답답한 상황이다. 교회가 보수적인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한 편의 정의만을 주장한다면 보수가 극우로 변질하는 지름길이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가치를 생산하고 유통해야 할 교회가 정치논리에 좌우된다면 또 하나의 분화된 세력으로 남겨질 뿐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선택해야 할 ‘편‘이 있다면, ‘신의 편’에 서는 것이다. ‘신의 편’에 서는 일은 자신이 신앙하는 신이 편드는 이들을 편드는 것이다. 하긴 자신들이 믿는 신이 누구의 편인가를 두고도 또다시 전쟁 같은 토론을 해야 할 것이라 그 또한 지난할 것이기는 하지는 말이다. 그래도 ‘신의 이름‘으로 편을 들겠다고 마음먹으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평화롭게 연대하고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미워하면 지는 것이다. 정의는 그래서 사랑이지 않으면 안 된다.

성석환(도시공동체연구소 소장,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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