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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칼럼

성석환(도시공동체연구소 소장,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2020.03.26

 불안하다 싶더니 결국 이런 식의 불필요한 감정다툼이 또 시작되었다. 어제 수업시간을 통해 학생들과 나눈 토론의 주제는 지금 정부가 교회에 요구하는 강력한 조치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대체로 지금과 같은 비상상황에서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국가의 정책에 적극 협력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나 역시 이미 공공성 차원에서 그리 하는 것이 큰 방향으로 옳다는 뜻을 밝힌 바가 있다. 다만, 정부가 공개적으로 혹은 일방적으로 과하게 밀어붙이는 ‘인상’을 주면 자칫 반발을 살 수가 있으니, 개신교 내부의 공적 라인이나 내부 체계인 지역협의회 혹은 노회, 총회를 통해 최대한 협력을 요청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정리했었다. 그러나 정부의 요구를 무시하고 종교의 자유를 내세우며 예배를 강행하다가 집단감염을 일으키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자, 사회적 여론도 들끓고 정부도 행정명령을 통해 보다 강력한 제재를 하겠다고 나서게 되었다. 정부는 정부대로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기 보다는 당장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더 급선무라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나 그 동안 정부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오고 또 대구지역을 위한 구제와 기부에 나섰던 교회들의 지도자들은 다소 불쾌한 감정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자신도 공공신학자로 자처하는 만큼 이성적으로는 ‘코로나19’ 사태 하에서는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생각하나, 감정적으로 ‘지나치다, 과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개교회의 예배상황을 모니터하겠다며 예배당 앞에 와 서 있는 공무원을 직접 본 이후였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총리의 행정명령과 구상권 청구 등의 공식입장 표명이 있자, 아니나 다를까 각 교단 및 교회연합단체들이 일제히 정부를 향해 감정 섞인 비판을 내 놓았다. 우리를 마치 ‘코로나19’의 진원지이거나 범죄집단인 듯 다루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었고, 심지어 이번 사태는 정부가 초기대응을 제대로 못한 탓인데, 왜 그간 적극 협력해 온 개신교의 책임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는 주장도 했다. 그 어조가 너무도 단호하니 본래 그것이 본심이었던가 싶기도 하여, 오히려 그 동안 적극 협력해 온 행보가 놀라울 정도였다. 총선정국에서 이런 식의 긴장관계가 형성되면,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변동요인의 사회적 주체로 기왕에 재부상한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보수성을 고려한다면, 정부 입장에서 볼 때도 이로울 것이 없을 듯 하고 개신교 입장에서도 추후 사태를 추스려 새로운 역할을 모색할 여유 공간이 없어져 사회통합의 여력을 상실할까 우려된다. 루터나 칼뱅은 한결같이 교회와 국가 모두의 신성을 인정했다. 당시 이러한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기독교국가라는 전제 하에 전개된 것으로 오히려 세속 영역에 대한 존재론적 가치를 부여한 일대 신학적 변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본의를 약화되고, 세속국가의 힘이 강력해지면서 종교는 근대사회의 사적 영역으로 축소되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분석이다. 지금으로서는 교회와 국가는 상호불가침인 듯 상호의 역할을 존중한다. 물론 중동의 신정국가처럼 통합되어 종교가 국가의 통치에 정치적 통제를 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유지한다. 정교분리 원칙은 서구의 경우 종교의 자유와 관련되어 있으며 시민사회의 발전에 따라 종교가 구분된 영역에서 개인의 사적인 선택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고 본 것으로, 국가종교를 두고 있는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도 종교의 자유의 원칙은 지켜지고 있다. 그런 나라들의 국가종교는 의례적이거나 상징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주로 도덕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최근 후기세속화 사회에서 종교가 가진 그 문화적 의미생산 역할이 중대하다 하여 종교의 공공성에 더 주목하는 것은 어쩌면 근대사회의 경직된 역할구분의 한계에서 나온 성찰이라 할 것이다. 한국의 경우 근대의 시공간이 매우 제한적으로 형성되었고, 그도 주로 제국주의와 독재정권이라는 국가주의 내지는 공권력의 강제력 하에서 경험된 것이 대부분이었고, 이 와중에 형성된 정교분리 원칙은 대체로 국가권력에 친화적으로 대응하는 우파를 중심으로 정당화되었던 탓에 지금도 말로는 정교분리라 하지만 실제로는 국가주의와 결탁된 모양으로 실천된다. 예컨대 국가조찬기도회가 그 결정판이라 하겠다. ‘코로나19’ 사태가 가져 온 이 새로운 형국은 우리가 지난 2017년 촛불정국을 거쳐, 조국정국을 지나면서 형성된 ‘공정의 문법’을 다시 한번 고려하며 새로운 정교관계를 정립할 계기가 될 전망이다. 나는 지금 교계가 국가의 고압적 태도에 비판적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충분히 심정적으로는 이해를 한다. 몇 몇 대형교회들이 사회적 지탄을 받았던 지난 시간을 인지한다면 지금 ‘코로나19’ 사태에 즈음하여 그래도 교회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은 그 시간들에 대한 성찰에서 온 긍정적 변화였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리 하는 것이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일이라 생각하며 협력한 듯 하다. 문제는 교회 내부의 영성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 국가의 강압적 태도에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반박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내부의 동요를 잠재우고 추후 다시 예배당으로 복귀하는 신자들에게 더 이상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천지는 논외로 치고, 정부의 태도를 보면 사실 다른 종교나 교파에 비해 개신교가 단일정치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의 전략을 구사하기 어려웠는지는 모르겠으나, 상대적으로 너무 안일하게 대처한다는 생각도 들긴 하는데, 예컨대 공개적으로 법적 조치나 배상을 요구하겠다 천명한 것은 그 표현방식이 다소 거칠어 오히려 예배강행자들에게 명분을 제공하는 패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상호이해의 폭이 좁고 긴박한 상황이라 발생한 일이라 여긴다. 이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한국교회는 여전히 한국사회의 변동을 일으키는 주요 인자임이 드러났다. 그것이 국가적으로 긍정적이려면 상호협력의 모델을 지금 제대로 구축해야 한다. 국가는 종교 내부의 문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들이 가진 자원들을 공적으로 동원해내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교회는 국가조찬기도회와 같은 전근대적 국가주의에 편승하는 행태와 결별하고 국가가 바른 정치를 하도록 비판 혹은 협력하는 도덕적 공동체로서의 공공성을 확보해야 한다. 적어도 “교회가 문제다!”라는 사회적 합의는 정부의 잘못보다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탓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교분리 원칙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설정하는 유일한 답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신학적 견해다. 오히려 교회는 정치적 책임을 부인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 시대의 정치적 과제에 대해 신학적이고도 공동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사회적 책무이다. 그 힘은 어디서 오나? 말할 것도 없이 깊고 깊은 영성이 토대가 될 것이다. 지금 겪는 혼란은 어쩌면 우리의 신심이 그리 깊지 못하여 발생하는 즉각적 반응이며, 정서적인 불쾌함, 기뿐 나쁨이겠으나 후대에 그런 감정조차 소비할 여력이 없어질까 걱정이다. 그러니 남탓 그만하고 빨리 우리 안의 우상을 제하여 그 무엇으로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체하지 않는 견인불발(堅忍不拔)의 단호한 신심으로 국가의 행로를 주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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